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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후정
    식도락/Fire and Fury 2018. 9. 19. 10:01

    [오후정]


    2019.09.17. 점심. 신은 나를 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나는 오랫만에 냉면이 먹고 싶었고, 수업시간이 빠듯한지라 동기 형과 택시를 탔다. 거금 10000원을 주고 택시를 내렸을 때, 슬픈 사실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유천냉면은 월요일이 휴무였다. 주인장은 재료를 구하러 멀리 떠나셨고, 우리는 대안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수많은 약국들 뿐이었고. 우리는 건대 앞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른 점심을 먹으려고 11시에 학교를 나섰지만, 시계는 이미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건대 중문에 있는 '초밥짓는 원숭이'를 가자고 마음 먹었고, 초밥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걸음은 20미터 쯤 모자라서 멈추고 말았다. '오후정' 건대 중문의 핫플레이스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식당에 눈길이 간 것이다. 그것이 신의 저주가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우리는 '오' 세트 A 를 주문했다. 반찬은 이것저것 많이 주워 담았다. 고등어 미소조림이며, 매콤돼지 생강구이, 바쿠단 크림카레 매운 돈코츠 나베, 샐러드, 명란 계란찜, 야끼소바 함박 스테이크, 나베돈까스 등등.... 하지만, 먹을 만한 음식은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꼭 맞았다. 한 상 가득 그릇들이 꽉 차있는데, 차마 젓가락을 들 수 없는 상황....


    매콤돼지 생강구이..... 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음식은 매콤하지 않았고, 그냥 맛없는 돼지 불고기 였다. 퍼석하고 식었다. 끄트머리는 탄 부분이 언뜻언뜻 보였다. 

    고등어 미소조림....에서 미소 맛은 나지 않았고, 캐러맬라이즈된 소스를 끼얹은 고등어 강정같은 맛이었는데, 고등어는 비렸고, 뼈가 문득 문득 나와 당황스러웠다.

    바쿠단 크림카레....는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래에는 머스타드 소스와 크림이 바닥에 깔려있고, 얇은 빵조각을 부풀려서 구웠는데, 윗부분은 타서 씁쓸한 맛이 났고,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는지는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매운 돈코츠 나베...... 역시 맵지는 않았고, 그냥 국물이었다. 중식집에서 볶음밥 시키면 공짜로 주는 국물만도 못한 건더기에, 아무 특징없는 국물. 그릇이 아까운 음식이었다. 

    샐러드..... 는 손을 대지 않아서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으나, 맛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명란 계란찜. 명란 계란찜은 의외로 이 가게에서 제정신인 음식 중의 하나였는데, 그냥 맛이 없고 퍽퍽하고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점만 빼면 나쁘지 않은 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야끼소바.....는 확실히 내가 알던 야끼소바 맛은 아니었고, 차라리 학식에서 나오는 야끼소바가 2.5배쯤 맛있었던 것 같다. 야끼소바가 갖추어야할 요소를 전혀 갖추지 못한 간장국수에 불과한 무언가였다. 




    함박 스테이크. 돌판 위에 거대한 호일에 싸여있어서 한 껏 기대하게 만든 메뉴. 하지만 호일을 벗겼을 때 나온 것은 5만원짜리 안심스테이크 만한 크기의 함박스테이크 였고, 맛은 어릴적 문방구에서 먹던 500원짜리 떡갈비 만도 못한 맛이었다. 글쎄. 과연 이걸 주방에서 먹어보기는 하고 나온걸까. 

    나베돈까스는 뭐랄까 일종의 화룡점정 같은 메뉴였는데, 딱딱하고 맛없는 돈까스를 간장 푼 물에 담군 음식이다. 위에 얹은 모짜렐라 치즈는 지옥처럼 굳어서 무슨 맛인지 상상조차 힘들게 만들고, 돈까스는 이틀묵은 상어고기를 씹는 것 마냥 딱딱하다. 

    마지막 피날레는 밥. 베스킨라빈스 싱글 레귤러 만한 크기의 밥이 나오는데, 이게 참 신의 한수다. 밥이 서로 들러붙고 쌀알이 다 뭉개져서 아무런 맛도 없거니와, 밥을 이쯤 먹고 나면 더 이상 음식을 먹고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이 모든 지옥같은 음식을 먹는데 든 돈은 3만원이다. 대지국빱 여섯그릇을 먹고 나와서 자판기에서 커피까지 뽑아먹을 돈으로 나는 이걸 사 먹었다. 

    참고로 별점이 하나인 이유는 별점 0점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덧붙여, 일방적인 비난을 가했던 호야초밥에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오후정에 오고나니 호야초밥이 아주 뛰어난 맛집이었음을 잘 알겠다.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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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정의는 승리하였고, 이 자리는 다른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뀌고 나서도 아직 무서워서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피같은 영수증으로 승리한 정의의 찬란한 기록을 이 블로그에 남깁니다.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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