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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식도락/맛집기행 ☆☆☆☆ 2021. 11. 30. 07:39
[서울역 그릴]
우리는 가끔 별똥별처럼 사라지는 한 시대의 끝을 본다. 이는 때로는 즐거운 일이지만, 떄로는 몹시도 괴롭고 가끔은 우울해지는 것이다.
경양식의 시대가 저물어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오늘은, 마지막 영업을 앞둔 '서울역 그릴'을 가 보았다. 영업종료를 하루 앞둔, 2021. 11. 29. 7시, 한창 손님으로 붐빌 가게에는 의외로 손님이 적다. 마지막 영업이라는 소식을 들은 손님 몇이 와있을 뿐이다. 대부분은 혼자서 온 손님들이다. 내 앞에서 기다리던 손님도, 뒤에서 기다리던 손님도 서울역 그릴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혼자온 손님들이 었고, 업장의 60%쯤은 그런 손님이었다. 한 시대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덕분에 혼자 식사를 하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고 좋았다. 한 때, 서울에서 가장 손님이 북적이는 식당 가운데 하나였을 서울역 그릴은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울역 그릴 입간판. 1925년부터 서울역을 지켜오고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었다. 경양식의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것은 아마 모두가 느끼고 있었을테다. 적어도 2000년 대 후반 이후로 경양식은 '외식코스'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더 이상 가족들은 함께 경양식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그 즈음하여 집에서 '비후까스'를 해먹는다거나 하는 일도 거의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완전히 대신했고, 일본을 통해 물건너온 경양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그 가운데 돈까스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완전히 녹아들어 팔지 않는 곳이 없어졌지만, 다른 '까스'들은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싼 맛' 이었을지도 모른다. 얇디 얇은 소고기를 튀긴 것 보다는 그냥 스테이크가 맛있을지도. 고기를 갈아서 만든 함박스테이크보다는 안심을 통쨰로 구운 것이 맛있을지도. 대구살을 튀긴 것 보다야 연어스테이크가 맛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그 맛이 이제는 잊혀지는 것은 왠지 슬픈일이다. 완두콩이며, 옥수수, 당근 같은 야채들을 삶아서 내어오는 사이드디쉬도,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캐첩을 섞은 소스를 버무리면 맛있다는 사실도 누군가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간 서울역 그릴은 훌륭했다. 아쉽게도 오므라이스를 시킬 수 없어서 돈까스와 생선까스를 하나씩 시켰다. 다 먹고갈 요량으로 시킨 것은 아니었는데, 먹다보니 다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라도 남기면, 그것이 경양식이 저물어가는 이유가 될까봐.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리면, 따뜻한 크림스프와 샐러드가 나온다. 아주 정석적이고 깔끔한 맛. 주문을 하고 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크림스프와 샐러드. 손으로 무언가를 집어먹을 필요는 전혀 없는 식사이지만, 식사 전에 손을 닦고 드시라고 물티슈를 제공한다. 크림 스프는 옆에 있는 후추를 조금 뿌려서 먹으면, 정말 맛이 좋다. 어디서 먹어본 맛이 나지만, 역시 어디서 먹어본 맛이 제일 좋다. 샐러드의 드레싱은 마요네즈 베이스의 소스 같은데, 이 또한 먹어본 맛이다. 다시 말하지만 먹어본 맛이 제일 좋다.
돈까스는 약간의 더운야채와 웨지감자와 함께 나온다. 곳곳에 양송이가 보이는 소스는 부드럽고, 간이 적절하다. 돈까스는 잘 튀겨져 있고, 적당한 기름기와 부드러운 고기 맛이 난다. 어쩌면 16,000원이라는 가격에 합당한 맛을 내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르겠다. 튀김옷이 먹는 과정에서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도 전혀 없고, 고기도 신선하고 잘 익었다. 약간 드레인이 덜 되어서 기름이 튀김옷 사이에 꽤 남아있었다는 점(이것도 흠을 잡고싶지는 않다. 아주 조금 남아있었을 뿐이었다)을 뺴면 훌륭한 돈까스였다. 다시 못먹는다는 사실이 아쉬울 만큼. 더운 야채는 설탕물에 삶았다고해도 믿을 정도로 달달하고 맛있다. 꼭꼭 눌러서 담아주는 밥도, 아주 향긋하고 맛있다. 어지간한 백반집에서 나오는 밥보다 맛있고 좋았다.
그에 비해 생선까스는 좀 평범했는데, 튀김옷이 돈까스 보다 두껍게 느껴졌다. 덕분에 부드러운 생선살과의 조화가 아주 일품이었다. 새우튀김도 한 마리 얹어주시는데, 적절한 크기의 새우를 반으로 갈라서 튀긴 듯한 모양새였다. 새우의 탱탱한 식감이 잘 느껴지는 튀김은 아니었지만, 맛이 좋았다. 어쩌면 찍어먹은 타르타르소스가 너무 평범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더이상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 누구에게 도움이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서울역 그릴의 돈까스맛이 그리워지면 나라도 가끔 들어와서 반추해보고싶어서 남긴다. 다시 서울역 그릴을 오픈할 생각은 없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졌다. 대구에 내려가면 전원돈까스나 가야겠다(사실 전원돈까스가 좀 더 취향이다).
재방문 의사는 있으니 혹시 누군가 나중에 재오픈을 염두에 두신다면 꼭 해주시라.
202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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